14. 히지카타.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살랑거렸다. 자장가처럼 울리는 말소리에 눈이 감겼다. 낮게 울리는 작은 웃음과, 손등 위에 얹힌 미적지근한 따뜻함. 넓게 펼쳐지는 푸른 빛의 옷자락 끝이 얼굴을 간지럽게 걸치는 그 느낌. "그만 일어나시죠." 아. 잠들었었나 보다. 히지카타는 뻐근한 뒷목을 주무르며 일어났다. 게슴츠레 뜬 눈 앞에 오키타가 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모습이 있었다. 무슨 꿈을 꾸길래 미동도 않고 잡니까. 그 꿈 나한테 팔아. 윗입술을 비뚜름하게 올린채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이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히지카타는 엎어져 있던 책상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 그 짧은 시간동안 주위가 시끄러웠음에도 깊게 잠들어있었던 히지카타는 다음 수업이 체육시간임을 상기해냈다. "아까 좋은 꿈 꿨..
13. 안 돼. 금발의 머리카락이 눈 앞에서 살랑거렸다. 약점을 보완한다며 사람의 피부처럼 느껴지는 살결과 진짜로 따뜻한 체온을 가지고 돌아왔던 그는 너무 늦었다며 달이 뜬 하늘을 바라보던 이에게 두꺼운 이불을 얹혔었다. 바람이 울고 산이 침묵하는 깊은 곳에서, 그는 죽은듯이 잠을 자는 이의 얼굴을 하염없이 보았다. 이윽고 그의 볼을 따라 의미없는 물방울이 누워있던 이의 손을 적실 때, 그가 사랑하는 이는 눈을 떴다. 미안. 짧은 너의 한마디가 심장을 죄었다. 세상이 불 타고. 인간이 죽고. 별은 황폐해져 아무도 찾지 않는 버려진 행성이 되었을 때. 모두가 등을 질 순간조차 없었던 그 때에. 너마저 나를 버리고 가지는 마. 타들어가는 목소리와 꺼져가는 회로를 악물고 버틸 때. 모두와 함께하는 죽음을 홀로..
10. 제 품으로 파고드는 분홍빛 머리카락을 슥슥 쓸으며 긴토키는 창에 머리를 기댔다. 스쳐지나가는 풍경에 빗방울이 끼어들었다. 사선으로 생겨나는 비의 흔적에 긴토키는 다시금 제 어깨에 파묻은 머리통을 내려보았다. 형. 날 미워하지 마요. 이윽고 건조하게 내뱉어진 소리를 무시하며, 긴토키는 다시 창에 머리를 기대었다. 허리를 껴안은 손길이 이내 배를 쓰다듬었다. 티도 나지 않는 것을 벌써부터 애간장이 타는듯 아슬아슬한 손으로 문지른다. 카구라에겐 말하지 말고, 이 애도 네가 데려가. 차갑게 내치듯 말하는 말은 그저 어쩔 수 없이 떠맡은 강제임을 떠올릴 수 밖에 없었다. 카무이는 그저 드러난 그의 목덜미에 모른 척 입을 맞추었다. 여섯 달 후 태어날 아이는, 모체를 닮아 희게 빛나는 머리카락과 유순한 눈매..
8. 나도 팥빵 좋아하는데. 씨익 웃으며 하나를 채가고는 하는 말이었다. 그것보다 어떻게 알았습니까아!! 감시자의 역할로서 길거리에 숨어있던 야마자키는 제 옆에 쭈그려 앉아 팥빵을 베어무는 긴토키를 보며 기겁했다. 여기까지 와서 남의 식량을 탐내다니, 너무한 거 아닙니까. 야마자키가 툴툴대면서도 팥빵이 가득한 봉지를 품 안에서 넘기자 긴토키가 입이랑 행동이 다르다며 키득키득 웃었다. 형씨가 이러는 거 알면 저 부장한테 혼나요. 야마자키가 우울한 듯이 말하자 옆에 앉아있던 긴토키가 친근하게 야마자키의 어깨에 팔을 두르며 다독였다. 왜? 나 때문에 일 안한다고? 여튼 그 자식이 못살게 굴면 우리집으로 도망쳐. 내가 숨겨줄게. 이래봬도 은혜는 갚는다고? 낮게 속삭이는 말에 다른 곳에 반응이 일어난 야마자키는 ..
5. 인간은 너무 약해. 부러진 발목이 묘한 방향으로 뒤틀려 있었다. 덜덜 떠는 그의 입술 사이로 이빨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평소와 같은 선한 웃음을 걸고있던 입꼬리가 만족감으로 비틀어져 올라갔다. 밝게 빛나는 파란색의 눈동자에는 광기가 스며들었다. 흰 머리카락을 적시며 툭툭 떨어지는 피와 이질적이게도 말라붙은 정액. 흰 유카타가 난잡하게 벌어져 나타난 몸에는 울긋불긋한 자국이 붉은 꽃처럼 피어있었다. 키득키득 웃는 낯짝을 올려보는 사내의 얼굴에 공포가 가득했다. 뼈가 부서지고 몸이 관통당하고 이마가 찢어져 피가 흘러내려도 단 한 번조차 내비치지 않았던 공포가 성적인 고문으로 변질되자마자 그 얼굴에 나타났다. 벨트로 묶여진 두 손목이 셀 수 없는 마찰에 짓이겨져 피가 새어나왔다. 카... 카무이. ..
4. TS 너 자꾸 이럴래? 내가 뭘. 앞머리를 짜증스럽게 쓸어올린 이의 번듯한 이마가 눈에 들어왔다. 온통 검은색인 방안에서 이질적이게 하얀색인 이는 번뇌하는 상대방의 기분을 모른척 침대에 쭉 뻗어있었다. 오키타가 열쇠 줬지. 왜? 내가 내 여자 방에서 자는게 뭐 어때서. 나 생리 중이라고. 신경질이 나는듯 미간을 구기면서도 결국 침대에 걸터앉은 그녀는 하얀 머리카락을 배배 꼬며 히죽히죽 웃는 긴코의 배를 툭 쳤다. 와, 귀신 부장님도 그런거 해? 재밌냐? 응? 재밌어? 걱정 마. 나도 생리 중이야. 금방 이불을 덮으며 생긋 웃는 긴코를 보곤 토시코는 뻐근한 뒷목을 주물렀다. 일이 하도 쌓여있어 며칠 내리 밤을 새웠던지라 제 컨디션은 최악이었다. 허리가 끊어질 듯이 아파, 빨리 약이나 먹고 잠드려는 것..
2. 이건 아니지. 이건 진짜 아니지. 허리가 욱씬거렸다. 평소라면 잘만 떠들어댔을 어느 몸 부위에 대해 사카타는 입도 벙긋 못하며 그곳에 대한 아픔을 속으로 삼켰다. 천진한 얼굴로 쳐자는 제 옆의 인간을 보자니 어이가 없어서 당장에라도 염라대왕과 한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제 허리를 두른 팔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어, 이젠 무어라 따질 힘조차 없었다. 이 개자식아, 순결한 긴씨를 따먹고도 잠이 오세요? 3. 아, 뭐야. 동정 군이잖아. ..정말 네 놈의 상스러운 말투는 따라갈 수가 없군. 대체 누가 동정이냐. 아. 너 말하는 거냐? 이골이 난 얼굴로 품안에서 담배를 쥐어든 히지카타는 말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굴었으면서도 이내 빡빡하게 대꾸했다. 경단을 먹고 있던 긴토키가 슬핏 ..
1. 아오. 넌더리가 난다는 듯 시선이 얽혔다. 그 표정은 이쪽에서 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짜증스럽게 응수하려던 외침은 결국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걸음을 딛는 순간 평형 감각이라도 잃은 듯 휘청거리는 몸을 보곤 저도 모르게 다가서려 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갈 수록 하늘색처럼 빛나는 은발이 나풀거렸다. 그렇게 쳐맞고도 멀쩡해보이는 얼굴에 다시금 짜증이 솟았었지만 역시나 얼굴에만 상처가 덜한 것이었다. 이제보니 귀 부근에선 핏방울이 톡톡 거리며 검은 옷에 스며들고 있었다. 와, 넘어질 뻔 했다. 짧은 감탄사와 함께 겨우 중심을 잡은 그가 여전히 허리를 굽힌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지켜보는 히지카타의 분노가 단전부터 끓어올랐다. 얼 빠진 얼굴로 노려보는 시선에 긴토키가 고개를 들으며 웃었다. 야, 표정 ..